1.3Km 2023-11-14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웅진백제역사관은 공주시 웅진동 무령왕릉, 송산리 고분군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원래 2013년에 개관했다가 2020년에 전시실을 전면 개선하여 재개관하였다. 전반적으로 웅진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방향으로 꾸며졌으며, 백제의 공주 천도 이전과 이후에 대한 이야기들도 함께 담겼다. 크게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었으며, 1실은 [왕도 웅진]을 주제로 왕도 웅진이 건설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만화영상과 웅진도읍기 왕들의 초상화, 그리고 그들의 업적을 보여준다. 2실은 [갱위강국]을 주제로 웅진에 도읍하고 다시금 강국으로 부활한 백제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3실은 [문화강국]을 주제로 백제의 활발했던 국제 교류와 이를 바탕으로 피어난 화려한 백제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 외에는 북카페와 휴게공간을 마련하고, 로비와 복도 곳곳에 웅진 백제의 문화를 반영한 콘텐츠들을 배치하였다. 웅진백제역사관은 국도 40호선 왕릉로를 통해 접근할 수 있고, 주변에는 또한 공주문예회관, 황새바위성지, 공산성 등이 있다.
1.3Km 2024-07-26
충청남도 공주시 공산성길 59-22
쌍수정사적비는 공주 공산성 진남루 서쪽에 위치한 비석이다. 조선 인조 2년(1624) 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에 머물렀던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숙종 34년(1708)에 건립됐다. 이괄의 난과 인조의 피난에 대한 내력을 쓰고 공산성에 머무른 10일 동안의 행적, 그리고 공산성에 대한 내용을 적았다. 비신은 방형의 오석이며 너비와 두께는 거의 같은 크기이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76년 1월 8일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3Km 2024-07-26
충청남도 공주시 고마나루길 5
공주문예회관은 공주시가 1990년 건립한 문화시설로 2021년부터 (재)공주문화관광재단이 위탁운영을 맡고 있다. 공주 유일의 공립 공연장으로 지역 문화 예술인들의 작품 발표 공간을 확보하고, 시민의 일상에 예술을 불어넣는 것을 목적으로 운영한다. 문예회관 내 시설로는 629석 규모의 대공연장과 106석의 소공연장, 게스트룸, 어린이방 등이 있다. 특히 대공연장은 뮤지컬, 연극, 무용, 음악회 등 다양한 공연이 열리며 지역문화예술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주변에 공주시민운동장, 공주 무령왕릉, 충청남도 공주의료원 등이 있어 찾아가기 쉽다.
1.3Km 2023-11-14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공산성 쌍수정은 공주시 금성동의 공산성 서부 고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이 정자는 조선 영조 10년(1734)에 처음 세웠다. 인조가 이괄이 일으킨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잠시 피난 왔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다 1970년에 전체적으로 해체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쌍수정은 공산성 정문인 금서루와 쪽문인 진남루 사이에 있어 접근하기 용이한 편이며, 바로 밑에는 백제 추정왕궁지와 쌍수정 사적비가 있다. 공산성 쌍수정은 웅진로, 왕릉로 등을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대중교통은 공주 시내버스 정류장을 거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인근 관광지로는 공산성 외에 은개골역사공원, 산성시장 등의 관광지가 있다.
1.3Km 2022-12-28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길 38-5
혜간헌은 고요하게 잠들어 있던 작은 한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꾸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어지럽고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작지만 아늑하고, 포근한 이곳에서 잠시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
1.4Km 2024-06-13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 37-2
사적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 웅진시기(475~538년)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금강의 남쪽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호분과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 강점기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호분과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1~5호분은 백제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돌로 만든 굴식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던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이다. 벽돌무덤은 백제에서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양식의 무덤으로, 이는 백제가 중국 남조 양나라와 활발히 교류를 했다는 증거이다. 특히 무령왕릉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석수와 도자기를 비롯하여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 태국 및 인도와의 교류를 의미하는 장신구 등이 발견되어 백제의 수준 높은 국제적 문화교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1.4Km 2023-08-08
백제의 두 번째 도읍인 공주는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60여 년간 전성기를 누린 백제의 고도이다.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왕릉으로 천년 넘는 세월 동안 고스란히 묻혀 있던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웅진이란 지명이 유래한 곰나루는 곰사당과 함께 노송이 우거져 강변을 따라 산책하기 좋다.
1.4Km 2024-05-08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로 280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중요한 유적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포곡형(包谷形)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石城)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또는 공산성으로,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한 이후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다.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암문, 치성, 고대, 장대, 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 영은사, 연지, 임류각지,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 공주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백제문화제 기간에는 공산성 앞에서 금강신관공원까지 부교로 건널 수 있다. 금서루에서는 백제왕국의 위풍당당함을 ‘웅진성수문병근무교대식’으로 볼 수 있고, 금강신관공원에서는 밤풍경이 아름다운 공산성 감상이 가능하다.
1.4Km 2024-03-19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041-840-8069 / 041-840-3800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공산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웅진성 수문병 근무교대식’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 아래 제작된 의상과 소품을 활용하여 당시 왕성을 호위하던 수문병의 근무를 재현한다. 혹서기인 6월 둘째 주부터 8월 말까지 제외하고 4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일요일에 진행된다.
1.4Km 2024-10-17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 118 (금성동)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참수 처형으로 대표되는 순교성지이자 순교자의 처절하고 용기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모범을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자리를 돌아보고 새로 나는 장소, 은총의 배움터이다. 박해시대 초기에는 사형 판결을 받은 사학죄인들에게 해읍정법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고자 사학죄인들을 출신 고향에서 공개 처형한다는 의미이다. 사학죄인으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를 거부할 경우 사형 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제민천변 황새바위에서 참수 처형 되었다. 황새바위 순교성지의 위치는 지리학적으로 금강의 본류와 제민천의 지류가 만나는 모래사장으로 공개처형지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1784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세례를 받고 고향 내포에 내려와 신앙을 전하면서부터 시작된 내포교회는 곧 박해에 부닥치게 되었고, 기록상 마지막 순교자를 낸 1889년까지 100여 년 간 공주는 박해의 땅이었다. 신유박해(1801년)부터 시작하여 이존창 루도비코 및 이국승 바오로 등 16명이 이 시기에 참수처형 되었고, 병인박해(1866년) 시기에는 약 1,000여 명의 순교자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공주는 천주교 4대 박해와 함께 100여 년 순교 역사의 현장이다. 공주는 내포와 더불어 천주교 전파가 가장 활발했던 곳이며, 조선시대에 충청감영이 있었기에 천주교인들이 가장 많이 처형된 곳이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은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배교하기를 거부할 경우 사형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처형을 당하였다. 지금까지 자료조사를 통하여 발굴된 순교자는 총 337명으로 이는 한국 최대의 기록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