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9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향교로 23-1
가평향교는 1398년(태조 7년) 세워졌으며, 현재의 건물로는 대성전, 서무, 내삼문, 제실, 명륜당이 있어 전통 향교의 원형을 갖추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1636년(인조 14년)에 대성전 일부가 파손되어 개축하였고 1950년 한국전쟁 때 대성전이 불 타 휴전 후 새로 지었다. 이후 1980년 대성전과 동무, 내삼문을 수리하고 1985년에 명륜당을 새로 지었으며 2017년 화재로 명륜당이 일부 소실되어 이듬해 복원하였다. 가평향교의 배치는 학문을 닦는 명륜당을 앞쪽에 두고 제례를 드리는 기능을 하는 대성전이 뒤에 놓인 전학후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성전 내부에 공자를 비롯한 다섯 분의 성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동쪽벽으로는 송준길 등 열 분의 현인의 위패를 서쪽에는 주희를 비롯한 열 분의 현인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2026-03-09
경기도 여주시 주내로 13
여주시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현충탑이다. 여주의 영월근린공원내에 위치해 있으며, 1959년 6월에 건립하였으나, 시설 규모가 작고 부지가 좁아 2005년 6월 1일 다시 세웠다. 현충탑은 조각가 이경순[李慶順]의 작품이다. 여주 도자기의 곡선미를 살리고, 여기에 여의주를 문 용의 몸짓을 소총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현충탑 뒷면에는 호국영령들의 위패벽이, 좌우에는 호국용사상이 설치되어 있다. 탑을 다시 세우면서 14위를 추가해 총 958위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해마다 1월 1일 아침과 현충일에 군민 추도 및 참배 행사가 열린다..
2025-06-10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령길 40 (대자동)
성령대군 이종은 조선 태종의 넷째 아들이자 양령, 충령(세종대왕)대군의 친동생이다. 1414년에 대군이 됐으며, 어려서부터 태도가 의젓하고 총명해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이를 몹시 비통히 여겨 친히 제문을 짓고, 분묘 옆에 대자암자를 지어 대군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성령대군의 묘는 대자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장대석 3단을 쌓았으며, 주위에 호석을 둘렀다. 묘 앞에는 상석, 장명등을 두었으며 좌우로는 문인석을 배치하였다. 석조물이 많고, 조성양식도 특이해 조선시대의 묘제 연구에 좋은 자료다.
2025-11-05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고려 말기의 명장으로 고려를 지키려다 처형된 최영 장군의 묘이다. 홍건적을 평정하고 수십 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영토를 빼앗으려 하자 요동정벌 계획을 세워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388년 이성계 등의 신진세력에 의해 처형되었다. 묘역은 부인 문화 유 씨(文化柳氏)와의 합장묘로 하나의 봉분으로 조성되었다. 묘제는 원형이 변형되었지만, 석물은 옛 것과 새것이 섞여 있다. 봉분은 고려 말기의 전형적인 직사각 형태이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래 부분에 2단으로 둘레석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정면 왼쪽에는 묘표를 세웠고, 봉분의 정면 오른쪽에는 무민공 충혼비를 세웠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문석인 등을 조성하였는데 모두 1970년대에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이 묘역은 고려시대의 묘제가 일부 남아있어 학술적 가치가 있다.
2025-03-17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해미향교길 2-13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해미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如美縣)이 해미현(海美縣)으로 합쳐지면서 세웠다. 그 뒤 조선 헌종 10년(1844)에 고쳐 지었고, 1924년에 보수를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유학자 9명과 우리나라 성현 18명 등 27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주변에는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여숫골) 등이 있다.
2026-06-11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이곳은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자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 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해미 현감이 충청좌도의 국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처형하였다. 그런데 1866년 병인박해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1935년 서산성당 범바로 신부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들의 유해 중 일부를 발굴하면서 박해의 전모가 드러났다. 발굴된 유해는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에 이곳으로 다시 옮겨와 보존 중이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이 홍보, 모금 활동을 벌여 2003년에 성지를 조성하여, 해미성지성당과 함께 16m 높이의 (해미순교탑), (무명순교자의 묘)를 건립하였다. 2014년에는 로마 교황청이 해미 순교자 3명을 가톨릭교회 공적 공경 대상인 복자로 추대하고 교황 프란체스코가 직접 방문하였다. 이곳은 서산 아라메길 해미국제성지길의 시종점이기도 하다. 해미국제성지길을 따라가면 내포 지역에서 해미로 넘어가는 순교자 압송로였던 한티고개가 있다. 주변에는 그 외에도 해미읍성, 해미향교, 해미시장, 산수저수지 등이 있다.
2025-03-17
충청남도 서산시 향교1로 26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된 서산향교 경내에 있는 거목이다. 1982년 10월 15일 시나무로 지정되었다. 둘레 430cm, 높이 33m 소유자 및 관리자 서산향교로 되어 있다. 이 나무는 조선 이조정랑 한여현이 지은 우리 지역 최초의 군지인『호산록(1619)』 의 향교조에 선인이 은행나무 네 그루를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 나무 중 하나로 추정수령이 430년으로 역사가 깊다.
2025-03-19
충청남도 서산시 향교1로 26
서산향교는 조선 태종 6년(1406)에 서문 밖에 세워졌다가 그 뒤 선조 7년(1574)에 군수인 최여림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향교 안에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동재·서재,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유학자 7명과 우리나라 성현 18명 등 25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배우는 공간인 명륜당은 앞면 8칸, 옆면 2칸 규모로 되어 있다. 명륜당 앞마당에는 조선 정종 때 심었다는 500년 정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2025-03-19
충청남도 서산시 성암1로 45 (읍내동)
성암서원은 유숙과 김홍욱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유숙(1324∼1368)은 고려 문신으로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워 서령군으로 봉해지고 일등공신 칭호를 받았으나, 공민왕 14년(1365) 그의 충직을 두려워하던 신돈에게 교살당하였다. 김홍욱(1602∼165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등 여러 벼슬을 거친 분이다. 효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으로 죽음에 이르렀는데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숙종 45년(1719)에 세운 이 서원은 경종 1년(1721)에 나라에서 내린 ‘성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세웠다. 대문 격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재와 서재가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고, 유숙과 김홍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26-03-12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정승로88번길 23-73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망명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방촌 황희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공민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학록을 지냈으며, 고려가 멸망하자 한 때 시골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었고, 이후 여러 직책을 두루 맡았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6조의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기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태종 대의 관직생활을 통해 얻은 국정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을 토대로, 세종 대에는 20여 년간 나라살림을 총괄하던 의정부에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문예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에 크게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