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9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동호1길 217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는 1810년에 이진악 선생이 지은 주택으로, 조부인 이지유의 호를 따서 동호재라 하였다. 동호마을의 안쪽에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안쪽 높은 곳에 안채 영역을 두고 낮은 곳에 사랑채 영역을 직렬로 배치하였다. 안채 영역은 서향한 안채가 있고, 우측 방앗간 채와 안채의 맞은편에는 곳간채를 튼[ㄷ] 자형으로 배치하고 있고, 안채의 좌측에는 별도의 텃밭을 두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정지, 툇마루가 딸린 안방 마루 2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영역은 큰 사랑채와 중사랑채가 나란하게 남향하고 있으며, 사랑채 맞은편에는 대문채가 배치되어 있다. 큰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중앙에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을 두고 좌우에 마루 1칸과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된 실을 배치해 평면에서 보면 중앙의 온돌방이 돌출된 것처럼 보인다. 좌측 온돌방은 위패를 봉안한 가묘 방이며, 우측 온돌방은 상례 시에 빈소 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2026-07-16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거창 포충사는 조선 후기 무신인 화촌 이술원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1737년에 창건되어 포충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처음에는 거창읍 대동리에 세워졌으나 177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이술원 장군은 1728년 거창현 좌수로 재임하던 중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거창현감 신정모의 명을 받아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정희량에게 붙잡혀 순절하였다. 이후 이조판서와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으며, 충강공의 시호를 받았다. 포충사는 계수천 인근에 자리한 동향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에는 내삼문이 있고 앞쪽에는 경의당과 자전루가 배치되어 있다. 양사당과 고직사도 함께 갖추고 있어 서원과 유사한 건물 배치를 이루고 있다.
2026-07-16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거창 감악사지 승탑은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고려시대 승탑으로,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시기 위해 세운 불교 석조문화유산이다. 원래 감악사 절터에 있었으나 198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승탑은 3단의 받침돌 위에 팔각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받침돌에는 구름과 용, 연꽃무늬 등을 섬세하게 새겼으며 지붕돌의 귀퉁이에도 꽃 장식을 표현하였다. 꼭대기 장식 일부는 없어졌지만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고려시대 승탑의 조형미와 조각 기법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2026-07-21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로10길 20-8 (불광동)
천간사는 1960년 창건되었으며, 2009년 재개발로 인해 현재의 위치에 재건축되었다. 경내에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비롯해 창건주 스님의 부도탑과 육영수 여사의 추모공덕비 등 다양한 석조 유물이 조성되어 있다. 재건축된 사찰은 전통 한옥 양식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건축물로, 2011 대한민국 한옥공모전에서 '한옥상'을 수상하였다. 북한산 자락과 북한산 둘레길 인근에 위치해 사찰을 둘러본 뒤 자연 경관과 함께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으며, 도심 속에서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2026-07-21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거창 강남사지 석조여래입상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강남사지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입상이다. 높이 3.65m, 너비 1.5m에 이르는 대형 석불로, 부처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를 갖추고 있어 ‘강남불 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이 불상에서 유래하여 마을 이름이 ‘강남불’ 또는 ‘부처지이’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얼굴은 마모가 심하지만 목에는 세 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양어깨를 감싼 법의의 형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허리 아래 부분은 훼손되었으며, 보수 과정에서 일부 원형이 손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6-07-21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거창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은 금원산 북쪽 골짜기 큰 바위굴에 새겨져 있는 마애삼존불이다. 뒤의 돌계단을 오르면 바위굴이 있고, 안쪽 남향 바위에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의 부분을 삼각선으로 그어 구획하고, 가운데는 보주형으로 다듬어 세 분의 부처를 새겼다. 중앙의 부처가 두 보살을 좌우로 거느린 모양이다. 중앙은 아미타여래,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로 보인다. 연꽃 수미단 대좌 위의 본존불은 얼굴인 넓적하며, 얼굴에 비해 작은 눈, 코, 입, 크지만 밋밋한 귀가 토속적 인상을 준다. 좌우 보살의 얼굴도 비슷한데 화려한 옷자락은 조금은 번잡한 느낌이다. 삼존불 모두 도드라지게 새겼으나, 전체적으로는 납작하게 표현되었다. 본존불의 각진 어깨, 밋밋한 가슴, 부자연스럽게 가슴에 모은 팔, 막대 같은 다리, 좌우로 벌린 발등 표현은 고려시대 부처상의 특징이다. 오른쪽에 새긴 글에는 1111년에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고, 바위굴 아래의 가섭암 자리는 1770년 대까지 절이 있었다고 하며,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몇 개의 석재가 남아 있다.
2026-07-20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은하리길 100
구연서원은 1540년 요수 신권 선생이 세운 구연재에서 시작되었으며, 1694년 신권 선생과 석곡 성팽년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1808년에는 황고 신수이 선생을 함께 배향하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은 훼철되었으나, 문루인 관수루와 강당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경내에는 신권 선생의 사적비와 산고수장비, 열녀비, 효자비 등이 있으며, 관수루는 서원의 문루 역할을 하고 있다. 관수루는 위천변에 자리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바위와 작은 나무다리를 통해 출입할 수 있다. 인근에는 요수정과 수승대가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2025-03-19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은하리길 100
요수정은 요수 신권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처음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805년 후손들이 수승대 건너편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상량문에 1800년대 후반에 수리한 기록이 있다. 요수정은 수승대 건너편 솔숲에 부속건물 없이 홀로 세워진 중층의 정자이며,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어칸의 배면에 1칸의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로 구성하였다. 요수정은 자연 암반 위에 바로 세운 건물로 초석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특별히 기단을 조성하지는 않았고, 배면 쪽에 경계의 표시와 굴뚝을 겸하는 낮은 돌담을 쌓았다. 수승대의 경치를 감상하고, 시회와 교육 등을 위해 솔 숲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전통정자 건물로 형태가 매우 아름답다. 산간지역의 기후를 고려하여 정자의 내부에 방을 들이고 있어 이 지역의 건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2026-07-21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뚜껑돌을 덮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거창 내오리 지석묘는 구릉지대에 3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 가운데 제일 남쪽에 있는 것은 탁자식으로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86m, 너비 2.50m이다. 북쪽으로 약 5m 지점에 있는 것은 현재 덮개돌만 땅 위에 드러나 있는데 탁자식 고인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70m, 너비 2.40m이다. 나머지 1기는 수년 전 파괴되어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데, 하부구조가 일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 내부에서는 민무늬토기, 돌칼, 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고인돌은 영남 지방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탁자식 고인돌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인돌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025-01-15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한기리
거창 하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낮은 구릉의 정상부와 사면부에 있는 작은 계곡을 끼고 축성한 포곡식 산성이다. 하성은 거창 성기성과 비슷한 형태의 산성으로 추정되며, 언제 쌓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백제가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처음 쌓았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이일 장군이 왜장 가토의 군사와 치열하게 싸웠으나, 끝내 함락당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남매가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누이동생이 치마폭에 돌을 담아 날랐다 하여, 여성 또는 치마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의 주변 곳곳에는 돌을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있는데, 이것은 성을 쌓다 남은 돌이라고 전한다. 성의 평면 형태는 부정형이며, 원형이 훼손되어 둘레와 높이는 잘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산성이 방치되어 있어 잡목과 잡초가 우거져 있고, 성곽이 심하게 무너져 있어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