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2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안중근, 강우규, 이봉창, 윤봉길 같은 의열투쟁, 3·1 독립운동,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같은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하거나 혹은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순국선열유족회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 8월 15일 순국선열추념탑을 세웠다. 독립운동의 역정이 조각되어 있으며 중앙에 새겨진 태극기상은 우리 민족의 드높은 독립의지를 상징하고 있다.
2025-06-1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현저동)
전남 보성 출신 개화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서재필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건립된 동상이다. 송재 서재필 선생은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윤치호, 이상재 등의 협력을 얻어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종래 중국을 사대하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한국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을 세웠으며, 종래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고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또한, 토론회를 통해 시민들을 모아 나라의 독립과 개혁에 대한 토론을 시키고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租借] 요구를 반대하는 등 국민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의 경비에 바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셨으나 1951년 1월 5일 미국에서 87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2026-03-12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
성재이시영선생동상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신 김구선생동상과 함께 남산공원 백범광장 내에 세워져 있다. 성재 이시영 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전 재산을 바쳐 투신한 명문가의 다섯째 아들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당시, 형 건영, 석영, 철영, 회영, 동생 호영과 함께 6형제가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명문가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선생은 일찍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당하자 형제, 가족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진흥하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법무총장, 재무총장으로 재직하며 1945년 해방 시까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광복 후 환국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을 계승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1947년 성재학원 신흥대학(현 경희대)을 설립하였다.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1951년 5월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하였으며, 1953년 피난지인 부산 동래에서 서거하셨다.
2025-11-27
서울특별시 은평구 녹번동
이곳은 미국 선교사 윌리엄 얼 쇼(William Earl Shaw, 서위렴)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인 친구들과 자라난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서위렴 2세)가 목숨을 바쳐 한국을 사랑한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일하기 위해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던 중 한국 전쟁이 일어난 소식을 듣자 자기 가족들의 안위와 젊은 자신의 빛나는 미래를 뒤로 하고 해군 대위로 자원 참전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시 정보장교로서 작전 성공에 기여하였으며, 서울 탈환 부대를 이끌며 진격하던 중 1950년 9월 22일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28세 일기로 전사하였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를 우리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는 은성무공훈장을 각각 추서 받았으며, 2023년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한국전쟁 시 군목으로 참여한 그의 아버지 윌리엄 얼 쇼(목원대학교의 전신인 ‘감리교대전신학원’의 창립이사이자 신약학 교수)와 함께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숭고한 희생을 널리 전하고자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2025-07-03
서울특별시 용산구 두텁바위로 60 (용산동2가)
1950년 9월 28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할 때, 국군은 포병으로 참전을 자원한 학도 의용병들을 용산고등학교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341명이 선발되어 10월 20일 서울을 출발, 다음날 21일 평양에 도착하여 육군 제17사단 18 포병 대대에 배속되었다. 그 이후 1953년 7월 23일 휴전 때까지 장교 임관하거나 기간요원으로 전선에서 활약하였고 이들 중 112명이 전사·실종되었다. 순국 학도탑은 용산고등학교 학생 80명이 포병으로 참전한 것 이외에도 다른 군부대에 많은 학우들이 참전하여 꽃다운 젊음을 조국에 바친 넋을 기리기 위하여 1956년 10월 23일에 용산고등학교에서 건립하였다. 서울 학도병 참전기념비는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참전한 학도 의용병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참전 55주년을 기념하여 2005년 10월 20일에 서울학도포병동지회에서 건립하였다. 서울 학도포병 참전자 명비는 참전 65주년을 기념하여 2015년 10월 20일에 서울학도포병동지회에서 건립하였으며, 1950년 10월 20일 용산고에서 출정식을 하고 포병으로 참전한 서울 지역 학도의용군 34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울학도포병동지회와 용산고등학교, 용산고등학교 동창회 주관으로 매년 6월과 10월에 학도 의용병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는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2025-12-01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
반공순국용사 위령탑은 약 15m 높이로 조성된 탑으로, 나라를 위해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은 호국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 이후의 혈전과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국가 위기 상황에서 영등포구 관내의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반공연맹, 민보단 서북청년회 등 애국우익 단체소속 동지들과 경찰, 소방관, 학생 등 많은 애국 동지들이 구국의 신념으로 목숨을 바쳐 순국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위령탑은 신길역 옆의 여의도 샛강을 따라 놓인 노들길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6월에는 순국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이 탑은 영등포구 재향군인회와 반공순국용사위령탑 건립위원회에 의해 세워졌으며, 그 헌신적인 행동과 희생에 각종 애국 단체와 국민이 각별한 경의를 표하는 곳이다.
2025-12-01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단로 101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장충동 남산공원(남산 2호 터널 입구)에 위치해 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재학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 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고향인 천안 병천으로 내려갔다. 1919년 4월 1일, 3천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시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은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일제는 유관순을 이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하여 서대문형무소에 감금하였으나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으로 결국 1920년 10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25-03-17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현저동)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독립관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던 옛 독립협회 사무실로 쓰던 독립관을 고증에 따라 복원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원래 중국 사신 방문 시 접대를 하던 공간인 영빈관으로 사용하던 모화관 건물을 청·일 전쟁 이후 독립협회에서 사용하던 건물이다. 1894년 이후 서재필이 발의하고 독립협회에서 주도하여 개수한 후 독립관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민권·자강 사상을 고취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독립문과 함께 독립사상을 표현하였으나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독립관은 지상 1층 한식 목조건물로서 정면 6칸, 측면 4칸, 7량 팔작지붕 구조였으며, 원래 위치는 동남쪽으로 약 350m 지점이었다. 서대문독립공원 조성사업계획에 의거 전문가의 고증 자문에 따라 지상층은 당초대로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봉안 및 전시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행사 및 유물 보관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1996년 서울시에서 건립하였다.
2026-03-12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16
1973년 10월, 어린이대공원 동문 인근에 ‘백마고지 3 용사의 상’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상은 백마고지 전투에서 육탄 돌격으로 적 진지를 격파한 강승우 소위, 오규봉 일병, 안영권 일병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국군 제9사단 제30 연대 제1중대 제1소대 소속으로 1952년 10월 중부전선의 전략 요충지인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TNT, 박격포탄, 수류탄 등을 휴대한 채 적의 기관총 진지를 향해 돌진해 격파한 후 장렬히 전사했다. 이들의 용맹은 고지를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026-03-12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16
남강 이승훈선생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가난한 서민 가정에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16세에 유기상의 점원이 되었다. 약 10여 년간 유기행상과 공장 운영으로 큰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나라의 위기를 절감하고 평양에서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받아 40대에 사회운동에 뛰어들었으며,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고 신민회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해 징역 3년형을 받았다. 1922년 출옥 후 자면회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헌신했으며,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