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용산서원(동해)

용산서원(동해)

2025-07-24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효자로 583

1705년(숙종 31)에 최찬규, 최찬기 등이 지방유림과 협력하여 이세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생사당과 흥학비각을 세우고 용산사라 하였다. 이세필이 죽은 이듬해인 1719년(숙종 45)에 위패를 모시고 용산서원으로 개편하였다. 1784년(정조 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89년에 박문수·이태좌·이형좌 등이 중건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56년에 최만희·홍질현 등이 중심이 되어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고, 이이와 송시열을 추가 배향하였다. 1984년에 다시 이이와 송시열의 위패는 훼철하고 이세필만 단독 배향하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 각 4칸의 동재와 서재, 신문, 고사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세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동재와 서재는 유림의 회합과 학문 강론 및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고사는 서원의 관리인이 기거하는 곳이다. 현재는 감성 아뜰리에, 용산서원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문화체험, 인문학 특강, 효행길 산책 등을 운영하고 있다.

송담서원(대구)

송담서원(대구)

2025-03-19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530-47

송담서원은 대암 박성을 기리기 위하여 지방 유림들이 공의하여 17세기 후반에 세워진 서원이다. 자료에 간략한 내력만 확인되며,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 역시 현대에 복원된 외삼문과 강당, 비각 등이 전부이다. 넓은 대지 위에 토석담장을 두른 방형의 공간을 구획하고 정면에 출입문인 덕양문을 세웠다. 삼문을 지나면 강당인 경의당이 있다. 경의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중당 협실형으로, 전면에는 반 칸의 툇간을 두었다.

산양서원

산양서원

2025-07-09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원덕읍 산양서원1길 24

산양서원은 조선 시대 문신 황희(黃喜)를 제향 하기 위해 세운 소동사(召東祠)가 발전한 것으로, 1857년(철종 8년)에 건립되었다. 황희는 1423년(세종 5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당시 이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고(官庫)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이에 삼척 지방 주민들은 그의 은혜를 기려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소공대(召公臺)’라 불렀다. 1516년(중종 11년)에는 4대손 황맹헌이 이곳에 비석을 세웠고, 풍우로 무너진 것을 1578년(선조 11년) 6대손 황정식이 다시 세웠다. 이후 1824년(순조 24년)에 지역 사림(士林)에 의해 소동사가 건립되었고, 이것이 이후 서원으로 확장되어 현재의 산양서원으로 발전하였다.

동명서원

동명서원

2025-08-2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양양읍 서원길 44-9

조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으로 1628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조인벽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충현사를 설립해 위패를 모시고 동명서원이라 하였다. 양렬공 조인벽은 태조 이성계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불사이군(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의 의리를 지키며 양양에서 은거하며 유생들을 교육했던 사람이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전란으로 전소되어 1787년 경상북도 봉화로 옮겨서 복원하였다. 그 후로도 철폐와 복원을 반복하다 1974년부터 서원 복원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복원을 추진, 1982년에 완공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충현사, 6칸의 재실, 신문, 동·서 협문 등이 있으며 사우인 충현사에는 조인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재실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제향 때 제관들의 숙소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춘향제를 올리고 있으며 서원 입구에서는 붉은색의 홍살 문과 함께 양렬공 조인벽의 신도비를 볼 수 있다.

노동서원

노동서원

2025-03-16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서면 팔봉산로 1198-2

노동서원(魯東書院)은 우리나라 사학의 원조인 최충(崔冲)의 영정과 위패, 그리고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을 봉안하고 있다. 최충의 12대 손인 최변이 이곳에 낙향하여 자손들이 번창하자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지었다가 후에 노동서원이라 개칭되었다. 서원에 봉안된 두 영정은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노동서원은 유교적 전통문화 계승과 발전을 위한 행사의 장으로도 쓰이며 특히 인근 초·중·고 학생들의 유적순례지로서 좋은 장소가 되고 있다. 본 서원은 원래 홍천군 북방면 노일리에 있던 것을 수호(守護)의 어려움으로 인 하여 1932년 5월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6·25 동란에 소실된 동재와 서재 일부를 개축하고 수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또한 정례행사인 제향을 유림행사로서 받들며 연 1회 봉제사를 올린다.

구은사

구은사

2025-08-06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근남면 호국로 7003-23

철원군 근남면 사곡2리에 위치하는 구은사는 서기 1455년 단종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비분을 품고 산간으로 은거하여 불사이군의 지조로 일생을 마친 아홉 선비(김시습, 조상치, 박도, 박재, 박규손, 박효손, 박천손, 박인손, 박계손)의 충절을 모신 사당이다. 아홉 선비는 근남면 육단리, 잠곡리, 사곡리 등의 산간 계곡에 초막을 치고 은거하면서 권농에 힘쓰는 한편 사곡리 속계천(束溪川)변 행화정에 모여 바둑을 두면서 세상사를 논했는데 그 후 시운이 맞지 않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니 조선 인조 9년(서기 1631년)에 이르러 이지연 선생 등 여러 선비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매년 봄가을 추모제를 지냈다. 서기 186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는 철폐의 비운을 맞았으나 1921년 사당을 재건하고 6·25전쟁으로 다시 황폐화된 것을 지방유지들의 도움으로 1977년 중건(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포서원(김포)

대포서원(김포)

2025-04-30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황금로23번길 30-32

대포서원은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야산에 위치하였으며,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자 문신인 눌재 양성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양성지는 공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한 당애 최고의 문장가이자 사상가로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며 경륜 있는 정치가로 활약하였다. 조선 시대 책 동문선,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편찬에 기여했으며, 지리와 지도 전문가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홍문관과 규장각의 설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양성지는 1482년에 68세를 일기로 통진현 대포곡에 묻혔다. 1973년 양촌면 대포리에 있는 양성지의 묘소 밑에 사우를 창건하였으며, 그곳 지명을 따서 대포서원이라 했다. 서원은 강학 공간인 동재와 서재, 제향 공간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전학 후묘의 구조이다. 매년 4월 25일 이곳에서는 양성지를 기리는 대제가 치러진다.

강한사

강한사

2025-06-30

경기도 여주시 청심로 113 (하동)

강한사는 조선 중기 학자이며 정치가인 송시열(1607년-1689년)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송시열은 생전에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로 경기도 여주에 머물 때마다, 영릉(효종의 능)을 바라보며 효종의 북벌 정책에 대한 대의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정조가 영릉에 행차하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김양행에게 송시열의 사당을 짓게 하였고, 송시열을 높여 ‘대로’의 명칭을 붙여 사당을 ‘대로사’라 하였다. 그 뒤 1873년 10월 고종에 의해 ‘강한사’로 이름이 바뀌면서 현재에는 대로사 또는 강한사라 불리고 있다. 사당은 고종의 서원철폐(1871년 전국의 47개소 서원(사우 포함)만 남기고 모두 없앰)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강한사는 크게 사당과 강당 영역으로 구성되어있다. 사당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크기이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재실인 추양재, 대로사비각,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강한사의 사당은 특이하게도 서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영릉을 바라보기 위한 것으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보여 주는 것이라 전하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충렬서원

충렬서원

2025-07-03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충렬로 9-19

충렬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조광조[趙光祖, 1482~1520]의 학문과 덕행, 충성스러운 절개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충렬사[忠烈祠]에서 시작되었다. 충렬사는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죽전에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후 선조 38년(1605) 경기도관찰사 이정구, 용인현감 정종선 등이 정몽주의 묘가 있는 모현읍에 옮겨 중건을 시작하였다. 1608년에 사당 3칸, 동재와 서재 각 2칸, 문루 3칸 규모로 완성하고 문루 위에는 강당을 지었다. 이 때 조광조의 위패는 새로 창건된 심곡서원으로 옮겨졌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충렬서원으로 사액(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현판을 내리는 일)되었고, 이후 정몽주의 손자 정보와 병자호란 때의 충신인 이시직을 추가로 모셨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1년 사당이 중건되었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였으며 1972년 전체를 보완·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 중앙에는 정몽주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좌·우 위에 정보와 이시직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현절사

2024-12-09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2-42

현절사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안에 있는 곳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에 항복하기를 거부하다가 심양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숙종 25년에는 삼학사와 함께 항복하기를 거부한 문정공 김상헌과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조선 숙종 14년(1688)에 그들이 끝까지 척화의 의리를 내세우던 곳인 남한산성 기슭에 지었으며, 숙종 19년(1693)에는 나라에서 〔현절사〕라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현절사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앞면은 제사 지낼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퇴칸으로 개방하였고, 옆면은 바람막이 풍판을 달고 방화벽으로 마감하였다. 고종 8년(1871) 전국의 서원 및 사우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 때에도 제외되어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현절사는 평상시에는 개방되어 있지 않고 매년 춘계(음력 3월 중정일)와 추계(음력 9월 중정일), 2회에 걸쳐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향을 지낼 때만 개방되므로 방문 시에 참고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