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4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평원로 158
옛 원주역에 위치한 원주역 급수탑은 중앙선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급수탑이다. 급수탑 맨 꼭대기에 물탱크가 있고 그 아래로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 시설이 있었다. 꼭대기에는 환기창이 4개 있는 등 1940년대 급수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에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사라졌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 증기기관차 관련 철도 시설물로 가치가 높다.
2025-03-13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소초면 황골로 707
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산1번지의 입석사 위에 있는 입석대로부터 서북방 약 30m 지점의 암벽에 있는 좌상으로 입석사에서는 가장 오래된 석조물이다. 입석사 바위에는 많은 수의 이름이 각자 되었고 아래에는 근래에 신축된 대웅전과 산령각이 있으며, 그 아래에 요사체가 있다. 입석사지는 처음에 신라 의상대사가 이 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했다는 구전이 있을 뿐 다른 문헌이 없어 절의 내력을 알 수 없다. 불상의 총고는 86㎝, 단고는 24㎝, 어깨 폭이 40㎝ 이며, 뒤쪽에는 두광과 신광을 나타냈고 결가부좌하고 있다. 하단부에는 아래는 단엽의 양련으로 된 연화대를 받치는 좌대를 음각하였다. 머리부분은 완전히 양각되었고 아래는 선각으로 나타냈다. (출처 : 원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2025-03-19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호저면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비로자나불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불상의 얼굴은 투박하게 표현되었으며,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다. 손은 가슴에 모아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왼손의 둘째 손가락을 오른손이 감싸 쥐고 있다. 이는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상이 가지는 특징으로, 이런 손모양을 지권인이라고 한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사각형으로, 큰 연꽃이 위·아래로 조각되어 있다. 1999년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가 발견되어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2025-07-18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 신양 마을 뒤 야산 바위에는 선으로 조각된 삼존불상이 있다. 연꽃무늬 대좌 중앙에 본존불이 있고, 양 옆에는 협시보살이 서 있다. 얼굴 부분은 마모가 심해 형태를 식별할 수 없다. 양 어깨에 걸친 옷자락에는 굵은 선으로 표현된 옷주름이 남아 있다. 손은 많이 파손되었으나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양쪽 보살상은 둥근 머리광배를 지니고 있다. 왼쪽 협시보살은 문수보살로 보이나 손상이 심해 자세한 형상은 확인이 어렵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보현보살로 추정되며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상체는 짧고 하체는 길어 곡선미가 돋보인다. 이러한 형식은 통일신라 후기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특징으로 판단된다.
2025-03-25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76
밀부는 조선시대에 군사를 동원할 때 필요한 증표를 가리킨다. 위급한 상황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리는 명부이다. 이 밀부는 조선 후기 1800년(정조 24)에 예조에서 월정사 주지에게 내렸다. 작은 원형의 동판에 명문을 앞뒤로 새기고 나무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이것을 가죽 주머니에 넣고 허리에 찰 수 있도록 허리띠에 끼우도록 하였다. 1800년 정월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 현륭원에 원행 하실 때 인신을 새롭게 주조하여 달라는 상언이 있었는데 이를 임금이 예조에 내려 재가하였다. 밀부주머니는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허리에 찰 수 있는 허리띠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버클에 해당하는 띠고리 장식은 옥으로 만들어졌다. 붉은색이 일부 섞인 백옥을 투공의 기법으로 장식하였다. 암수 두 마리의 새가 꽃 속에서 서로 마주 보는 형상을 표현하였다. 국왕이 사찰에 내려 준 밀부로는 강원특별자치도에서 발견된 첫 사례이고, 정조가 오대산 월정사에 하사한 연대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등 조선후기 월정사의 불교사적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25-03-27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태장동
조선시대에는 왕자나 공주를 낳으면 오래 살기를 비는 뜻으로 이름난 산을 찾아 명당을 잡고 그곳에 태를 묻었다. 태가 묻힌 곳을 태봉이라 불렀다. 태장동 왕녀 복란태실비는 태장2동 우성 제2차 아파트단지 안에 있다. 아파트 신축 공사를 하면서 해체하였다가 다시 복원하였다. 이때 토기·백자기·돌함 등 24점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태호와 태지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2025-03-27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원충갑(1250~1321)은 고려의 무신으로 원주 출신이며 본관은 원주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향공진사로 원주별초에 있으면서 1291년(충렬왕 17) 합단적이 치악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에 걸쳐 적을 크게 무찔렀다. 원충갑의 이러한 공로로 원주는 익흥도호부로, 다시 1308년 원주목(原州牧)으로 승격되었고, 원주에 부과되던 각종 부역과 잡공이 3년 동안 면제되었다. 원충갑 또한 여섯 번 전임하여 삼사 우윤에 올랐다. 충선왕 때 응양군 상호군이 되었고, 합단적을 물리친 공으로 1319년(충숙왕 6) 추성분용정란광국공신이 되었다. 원충갑은 충숙왕 8년 나이 72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치악산 영원산성 안에 원충갑사가 세워져 제사를 모시다가 1669년(현종 10) 사당을 세워 원충갑을 주향하고 김제갑과 원호를 배향하였고, 1670(현종 11) 윤 2월 7일 충렬사로 사액되었다. (출처: 원주시청)
2025-03-26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호저면
용운사지 삼측석탑은 용운사터에 석불과 나란히 서있는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탑 주변에서 용운사라 새긴 기와가 발견되어 절 이름을 알게 되었다. 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 맨 윗돌 위에는 연꽃을 두른 두툼한 괴임돌을 두어 탑신의 1층 몸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독특한 장식 수법이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느리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 위로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기단부 맨 윗돌이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기단 윗부분에 아름다운 연꽃을 장식한 굄돌을 두고, 지붕돌 밑면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2025-03-19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문막읍 귀문로 1008
유물은 원래 문막읍 후용리 용바위골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해지며, 비석은 남아 있지 않다. 귀부와 이수는 같은 화강암의 석재로 조성하여 돌 색깔도 회백색이다. 귀부는 거북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용의 모습을 새긴 편에 가깝고, 머리를 왼쪽으로 돌려 뒤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지금의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를 세울 때에도 이 석재를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2025-03-27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부흥사터에 흩어져 있던 탑의 일부분들로, 아래층 기단(基壇)과 위층 기단 일부, 탑신(塔身)의 몸돌 1개, 지붕돌 2개를 수습하여 민가 옆에 모아 놓았다. 위층 기단은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 두었고, 기둥조각으로 나뉜 8곳에 8부신중(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여덟 무리의 신)을 각각 조각해 두었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네 귀퉁이에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위층 기단의 신상 조각 머리 부분에 특이하게도 둥근 두광을 새겨 놓아 눈길을 끄는 탑으로, 원주지역의 불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위층기단의 조각양식과 탑신의 짜임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