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김해박물관 어린이박물관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국립김해박물관 어린이박물관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국립김해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어린이박물관

15.9Km    3     2023-12-05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

어린이를 위한 전문 박물관으로 가야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전시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주제별로 다양한 전시물을 마련하여 가야 사람들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야 마을을 구성하였다. 가야 마을은 4부의 소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1부 ‘따뜻한 보금자리와 생활’에서는 가야 사람들의 주거, 먹거리, 생활 도구 등을 체험할 수 있고, 2부 ‘바다를 건넌 가야 사람’에서는 풍부한 철을 매개로 이웃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가야의 해상 교역을 체험할 수 있다. 3부 ‘가야 대장간’은 철의 왕국이라 불리는 가야의 철을 다루는 기술과 철로 만들어진 다양한 도구를 인터랙티브 영상으로 만날 수 있으며, 4부 ‘가야 공작소’는 준비된 교구를 사용하여 마음껏 만들고 부수며 즐길 수 있는 자율 놀이 공간이다.

파사석탑

15.9Km    21489     2023-11-23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190번길 19-7

수로왕의 비 허왕후가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올 때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 싣고 왔다고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파사석탑은 옛 호계사 자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허왕후 곁에 두어야 한다며 구산동에 있는 수로왕비릉으로 옮겼다. 아유타국 공주인 허왕후가 시집을 오면서 불교를 전래하고 오빠인 장유화상(허보옥)이 가락국에 와서 대국승으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파사석탑의 부재(部材)는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 파사석을 태우면 유황 냄새가 나고, 파사석을 갈아 닭벼슬 피에 떨어뜨리면 일반 돌과는 다르게 피가 굳지 않는다는 문헌이 남아있다.

오봉서원

오봉서원

16.0Km    1691     2023-09-26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오방길 9-12

1780년(정조 5)부터 세덕사(世德祠)에서 조광익(曺光益)의 향사를 올렸다. 1790년(정조 15) 자손들이 소(疏)를 올려 선생의 증조 청백리 조치우(曺致虞)도 향사할 수 있도록 청하였으며, 그 다음 해 함께 향사를 올리라는 윤허가 내렸다. 1795년(정조 19)에 밀양 사림(士林)들의 공의(公議)로 향사할 뜻을 태학(太學)에 통문하여 청효사(淸孝祠)라 현액하고 춘추로 향사하라는 답을 받았고, 그 다음 해에 처음으로 격을 높여 오봉 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후손들의 재숙을 위한 재실을 세워 오봉 서당이라 칭하였고, 1988년 청효사를 다시 설립하여 그전의 현판을 다시 붙이고 신문(神門)을 입덕문(立德門)이라 편액 하였다. 1989년에는 위판을 봉안하고 오봉 서원을 복원하였다. 1997년 노후한 강당과 정문을 철거하여 옛날의 모습대로 원위치에 중건하고 청효당(淸孝堂)을 실학당으로, 효우당(孝友堂)을 독지재(篤志齋)로 바꾸었으며, 정문을 숭유문(崇儒門)이라 현판 하였다.

MH 모던하우스 홈플러스김해

MH 모던하우스 홈플러스김해

16.0Km    0     2024-03-23

경상남도 김해시 김해대로 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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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플러스 김해

홈플러스 김해

16.0Km    0     2024-03-24

경상남도 김해시 김해대로 2078 (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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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영 홈플러스김해점

16.0Km    0     2024-06-11

경상남도 김해시 김해대로 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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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분산성

16.0Km    25717     2024-05-22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로405번안길 210-162

분산성은 고려 우왕 3년(1377) 박위 부사가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한 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것을 고종 8년(1871) 정현석 부사가 개축한 것이다. 성의 기초 선정 방법이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인 테뫼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때 최초 축성연대는 가야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평탄한 지형을 둘러서 그 주위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룬 성벽으로, 수직에 가까운 석벽은 높이가 약 3∼4m인데 무너진 부분이 적지 않다. 분산성에 올라가면 김해 시내, 김해평야와 낙동강, 남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분산의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돌을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현재는 시내 쪽 경사면에 약 900m의 성벽이 남아 있고, 성안에는 남북 2개 문지와 서편의 암문, 우물지 등 몇 개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성곽의 길이는 총 929m, 평균 폭은 약 8m이다. 산성 안에는 해은사가 있으며, 해은사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 승병이 주둔했다고 전한다. 김해시민에게는 만장대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데, 만장대는 조선시대 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길이나 되는 높은 대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됐다. 1999년에 복원된 봉수대 뒤편의 바위에는 만장대라 쓴 대원군의 친필과 동장이 새겨져 있다.

해은사(김해)

16.0Km    22347     2023-11-22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로405번안길 210-162

김해 최고의 명당인 만장대에 위치한 해은사는 정면 남쪽에서 낙동강 하류의 넓은 평야가 바라보이며, 서쪽에는 김해시, 동쪽에는 동김해시가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설화에 의하면 해은사(海恩寺)라는 이름은 인도 아유타국에서 고대 가야로 건너와 수로왕과 결혼한 허왕후와 그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무사히 항해를 할 수 있도록 풍랑을 막아준 용왕님께 감사하는 뜻에서 창건한 사찰이다. 해은사에는 다른 사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왕전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대왕이라 함은 바로 수로왕(首露王)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각 내부에 수로왕과 허황후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분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전진기지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해은사는 1982년에 영산전 중건을 기점으로 여러 법당을 중건하고 보수하였으며, 1997년에는 허황후가 배에 실어 왔다는 파사석탑을 재현하는 불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김해 수로왕비릉

16.0Km    27068     2024-06-12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190번길 1

김해 수로왕비릉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무덤이다. 허황옥은 원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하늘의 명을 받아 16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수로왕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수로왕릉과는 다르게 평지가 아닌 언덕에 지어진 점이 특이하며 근처에 굴식 돌방무덤 구조인 김해 구산동고분군이 위치해 있다. 왕비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정문인 구남문과 능 앞에 세우는 홍살문이 있다. 무덤으로 가는 오른편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숭보재가 있으며 왕비릉 앞에는 능비가 있다. 왕비릉 아래에 있는 파사석탑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건너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싣고 온 것이라 한다. 매년 봄가을 숭선전 제례 때 수로왕릉과 함께 제사가 거행되며, 매년 음력 9월 15일에는 김해문화원에서 주관하는 허황옥에게 차를 올리는 황후릉 헌공다례가 개최되고 있다. 수로왕비의 이름은 허황옥이며 수로왕 7년인 서기 48년에 16세의 나이로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건너와 왕비가 되었고, 서기 18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능은 조선 인조 19년에 축조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왕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두 아들에게 어머니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사충단

16.0Km    18495     2024-09-03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로405번안길 22-9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년) 4월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해를 지키다 전사한 김득기, 송빈, 유식, 이대형 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의 명으로 1871년에 건립한 묘단이다. 처음에는 동상동 873번지에 있었던 것을 김해의 도시계획으로 동상동 161번지 일원에 확장 이전하였으며, 매년 음력 4월 20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0년(선조 33)에 이들은 모두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에서 김득기와 이대형은 이조참판, 유식과 송빈은 호조참판으로 각각 추증(追贈) 되었다. 이 중 김득기의 묘는 한림면에 있고 이대형의 묘는 상동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