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Km 2024-06-12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해안길 202
솔섬은 금오산 어드밴처 레포츠 단지에서 내려다보이는 중평해안 앞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에 위치하며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작은 섬이다. 금남면 증평해안길 161번지 앞 솔섬 도선 선착장에서 솔섬 1호(정원 42명)를 탑승하면 약 5분의 항해로 솔섬에 도착하게 된다. 솔섬에는 하동미라클 해상정원 청소년야영장이 개장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미라클(Miracil)은 거울(mirror)과 청결함(ciean)의 합성어로 [하동미라클]에서의 체험과 경험은 스스로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mirror)이 되고, 살아가면서 날아와 앉은 먼지를 닦어내는(clean) 힐링의 장소가 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솔섬에 날개를 펴는 [하동미라클]은 청소년과 가족 이용객들의 환상과 모험, 신비함이 깃 들여진 힐링과 어뮤즈먼트(오락, 즐거음)의 멋진 장이 되기 위해 3만여 평의 부지에 250여 종 약 30만여 그루의 수목과 화훼단지를 관람할 수 있는 트레킹 산책로와 청소년야영장 내 숙소와 식당, 강당, 천연잔디 운동장과 야외무대, 글램핑장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통해 숙식과 야외 체험활동이 가능하도록 조성하였다. 2023년 4월 1일 개장하여, 하루 4회 정기 배편을 운항(10시, 11시, 13시, 15시)하고 있다. 트레킹 코스는 선착장>매점>숙소동>편백나무숲>섬북섬>글램핑장>숙소동>매점>선착장 코스로 약 2.8km 구간이다.
12.9Km 2025-03-18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수양공원길 51
사천시는 1995년 5월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어 탄생했으며 시내 중심부에 남해인 사천만이 깊숙이 밀고 들어와 시내가 크게 둘로 나뉜다. 이처럼 사천시는 해안평야 지대인 만큼 청동기 시대의 유적,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고인돌이 많다. 산성공원은 조선 세종 27년(1445)에 축성된 산성 일대에 마련한 공원으로 사천시민의 휴식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공원의 규모는 29,752㎡로 큰 느티나무와 소나무 등의 혼합림이 우거져있으며 사시사철 새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또한, 공원 내의 유서 깊은 수양루는 옛 사천 군청 앞 대로에 있었던 것을 이전한 것으로 무더운 여름에도 누상에서는 시원함을 느낀다.
12.9Km 2023-08-08
이 성은 세종 24년(1442)에 병조참판 신인손이 왕명에 의해 쌓았다고 전해지며, 처음의 기록에는 성 둘레 3,105척, 성벽의 높이 10.5∼11.5척, 성문과 옹성이 각 3곳이라 되어있고, 그 후의 기록에는 성둘레 5,015척, 성벽의 높이 15척, 성문과 옹성이 각 3곳이라 되어있어 후에 증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0Km 2025-03-17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수양공원길 51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인리 일대에 있는 사천읍성은 돌과 흙으로 쌓은 성곽으로, 약 1.5㎞의 둘레 중 현재는 3개 부근 약 300m의 성곽이 남아있다. 사천의 옛 이름이 사물(史勿), 사수(泗水), 동성(東城) 등이었는데 조선 태종 때부터 사천이라 하였다. 세종 24년(1442)에 병조참판 신인손이 왕명에 의해 쌓았다고 전해지며, 이곳에 돌로 성을 쌓기 시작하여 3년 후(1445)에 완성시켰다. 이로부터 4년 뒤 관청을 짓고 읍을 옮겼다고 한다. 처음의 기록에는 성 둘레 3,105척, 성벽의 높이 10.5∼11.5척, 성문과 옹성이 각 3곳이라 되어있고, 그 후의 기록에는 성둘레 5,015척, 성벽의 높이 15척, 성문과 옹성이 각 3곳이라 되어있어 후에 증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래 백성을 보호하고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많은 수모가 있었다. 특히 선조 32년(1598) 정기룡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연합하여 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여 왜적을 몰아냈다 한다. 현재 성 안에는 충혼탑, 수양루, 활을 쏘는 관덕정이 있는 산성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13.0Km 2025-03-19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자란만로 1622-11
고성군 하일면에 위치한 자연생태공원 솔섬은 섬에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4월 유채꽃, 진달래를 시작으로, 5~6월에는 하얀 이팝나무, 7~10월은 무궁화꽃이 만개하고, 9~11월에는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산과 바다를 품은 아담한 꽃섬이라고도 한다. 솔섬을 한 바퀴 도는데 약 40분 정도 소요되어 가벼운 산책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솔섬을 지도에서 검색해 보면 꼬리같이 길게 나와 있는 곳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장여’라는 곳으로 밀물 때 섬이 되고 썰물 때 바닷길이 열려 육지와 연결된다. 물이 빠지는 시간을 미리 확인하여 바닷길을 걷는 이색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솔섬 인근의 좌이산을 등산할 수 있고, 상족암군립공원 등이 있어 관광하기 좋은 여행코스이다.
13.1Km 2024-06-12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창선로153번길 240
고려 초 망경암이라 불리며 대방산 중턱에 창건된 사찰이다. 아침에 기도하면 저녁에 영험을 보는 제일의 기도도량으로 번창하여 오던 중 조선시대에 운대암이라 개칭되었다. 상좌중이 낙상 사망하여 한 동안 절이 비었다가 임진왜란 후에 세월선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법정화상께서 원력을 세우고 불심이 깊은 신도를 얻고자 일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대작불사를 하였으며 법당(무량수전)과 산신각을 1990년 12월에 완공하였다.
13.1Km 2025-07-25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 향교길 43-31
곤양향교의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곤양군이 세종 원년(1419)에 군으로 승격되었음을 상기할 때 향교도 세종시대에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중종(中宗) 25년(1530)에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곤양군조에 의하면 "관원은 군수·훈도 각 1인씩이다."라는 기록을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득강이 곤양군수로 부임한 후 그의 많은 업적 가운데 특히 향학에 힘써 많은 유생)을 길러 내었다 한다. 그 후 명종 1년(1546)에 군수 노진이 부임해 와서 처음으로 정동)에 터를 잡아 문묘를 지었다 하였으므로 이 향교 역시 전학후묘형의 소설위 향교임을 알 수 있다. 현종 4년(1663)에는 군수 박영계가 범동으로 옮겼고, 순조 7년(1807)에는 군수 신오가 부임해 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대성전, 대성문, 명륜당, 동재, 서재, 풍화루 등 9동의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대성전 좌우에 동·서 양무가 없고, 대성전의 위치 또한 명륜당 뒤의 오른쪽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어 두 영역이 완전히 분리된 배치를 보이고 있다.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앞에 있고, 사당인 대성전과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해 왔으며, 문묘의 위차위패를 모시는 순서)나 향사 등은 모두 사천향교와 같다.
13.3Km 2025-04-08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창선로97번길 6
남해군에는 남해도와 창선도라는 2개의 큰 섬이 있다. 그중 창선도는 하나의 면을 이루고 있다. 창선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가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하며, 항구를 따라 산책하는 것도 좋다.
13.3Km 2025-06-13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 무선2길 808
대한불교조계종 쌍계사의 말사인 문수암은 고성군상리면 무선리 무이산에 있는 암자로서 신라 의상조사가 창건했다. 창건 이후 이 암자는 수도 도량으로서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고, 산명이 수려하여 삼국시대부터 해동의 명승지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화랑도 전성시대에 국선 화랑들이 이 산에서 심신을 연마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중창 및 중건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현존하는 암자는 사라호 태풍 때 건물이 붕괴된 뒤에 지은 현대식 건물이고, 일반 신도들의 성금으로 1973년에 이 절에서 수도한 이청담(李靑潭)의 사리를 봉안하여 세운 청담 대종사 사리탑이 있다. 인근에 수태산 보현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문수암 입구까지 도로가 포장되어 승용차로 조금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면 문수암이 나타난다.
13.3Km 2025-03-16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사천향교로 25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세종 3년(1421)에 세워 유교를 공부했던 곳이다. 세종 22년(1440)에 향교 관계자들의 거처인 치성재, 학생들의 거처인 동·서재, 공부하는 장소인 명륜당, 휴식공간인 풍화루를 새로 지으면서 이름을 ‘수학원학사서재’로 바꾸었다. 현종 5년(1664)에 안혜원이 유교진흥을 위해 성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을 세우면서 비로소 교육과 제사를 겸했던 향교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여러 차례 보수했으며 현재는 동재를 없애고 풍화루를 폐쇄했으며, 외삼문을 통해 출입하게 하고 있다.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이 앞에, 사당인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향교의 일반적인 배치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