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Km 2024-01-18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계면 장무로 195
타짜 장면은 영화 타짜의 한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은 상호처럼 간판에 화투패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집의 대표 메뉴인 차돌 짬뽕은 푸짐한 양과 얼큰한 국물이 매력적이다. 각종 채소와 차돌이 어우러진 국물의 맛은 진하면서도 개운한 불맛을 느낄 수 있어 해장 메뉴로도 인기가 많다. 특히 차돌 짬뽕은 양도 푸짐하여 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다. 탕수육도 빼놓을 수 없는 메뉴 중 하나로 튀김이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워, 식사와 함께 미니 탕수육을 주문하는 손님들이 많다.
18.9Km 2024-06-27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원촌3길 29
거창 포충사(居昌 褒忠祠)는 화촌(和村) 이술원(李述原, 1679~1728)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1737년(영조 13)에 세웠다. 1737년에 포충사라는 사액을 받아 거창읍 대동리에 세웠지만 1777년에 현재 위치로 이건 하였다. 이술원 장군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1728년(영조 4)에 거창현 좌수(座首)로 있었다. 1728년에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켜 서울로 북상하고, 안의현(安義縣)에서 정희량(鄭希亮)이 이에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술원은 좌수로서 거창현감 신정모(申正模)로부터 현내(縣內)의 군사권을 위임받아 끝까지 대적하다 결국 정희량에게 체포되어 죽었다. 그 뒤 이조판서,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고 충강공(忠剛公)의 시호를 받았다. 거창 포충사는 계수천의 우측 곡저평야에 동향하여 자리 잡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평면은 정면에 툇간을 두고 배면에 통칸 마루방을 두었다. 공포 양식은 2익공 형식이며 상부가구는 도리가 다섯 개인 5량가이다. 사당에는 단청이 시문(施紋)되어 있으며 정면에는 정면 3칸인 내삼문이 있다. 사당 앞에는 경의당(景義堂)과 문루인 자전루(紫電樓)가 동서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양사당과 고직사도 있으며 건물 배치를 보면 서원과 유사하다.
18.9Km 2024-08-07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동호1길 217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는 1810년에 이진악 선생이 지은 주택으로, 조부인 이지유의 호를 따서 동호재라 하였다. 동호마을의 안쪽에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안쪽 높은 곳에 안채 영역을 두고 낮은 곳에 사랑채 영역을 직렬로 배치하였다. 안채 영역은 서향한 안채가 있고, 우측 방앗간 채와 안채의 맞은편에는 곳간채를 튼[ㄷ] 자형으로 배치하고 있고, 안채의 좌측에는 별도의 텃밭을 두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정지, 툇마루가 딸린 안방 마루 2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영역은 큰 사랑채와 중사랑채가 나란하게 남향하고 있으며, 사랑채 맞은편에는 대문채가 배치되어 있다. 큰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중앙에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을 두고 좌우에 마루 1칸과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된 실을 배치해 평면에서 보면 중앙의 온돌방이 돌출된 것처럼 보인다. 좌측 온돌방은 위패를 봉안한 가묘 방이며, 우측 온돌방은 상례 시에 빈소 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19.0Km 2024-11-05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지산로 727-13
착한 도깨비의 전설이 함께하는 참깨비체험휴양마을은 지산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터를 잡은 숙박형 농촌 체험마을이다. 가족단위 기업워크숍 동창회 동호회와 같은 단체손님이 주 고객이며 행사 진행에 필요한 시설과 장비를 잘 갖추고 있다. 지역주민의 복지와 화합, 소득 증대를 목적으로 하는 참깨비체험휴양마을은 도농교류의 중추 역할 수행하고 있다.
19.0Km 2024-11-01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시장천변길 36 장계재래시장장옥A블럭
063-352-0346
군산 대구선과 남해 원주선(구도 26번, 19번)이 교차되는 교통의 요지이며 경상남도와 전라북도가 인접된 지역으로 20년 전만 해도 장계 장날이면 인근 경상남도 함양, 서상과 전라북도 무주, 안성, 진안, 남원, 금산, 전주 등 각지에서 모여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현재는 상권 형성이 지역별로 활성화되면서부터 진안, 안성 일부와 지역민들만 이용하므로 규모가 작아졌다고 하나 우시장만은 성시를 이루고 있다. 3대째 운영하고 있는 전통적인 옛 대장간은 장계 시장의 명소이다.
19.2Km 2024-09-10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56-12
용연정은 양악리에 살던 정존성이라는 이가 소요하던 곳에 그의 손자 정기수가 세운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입구에서 덕유산의 토옥동계곡을 따라 약 1km 올라가면 층암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가 소를 이루는 용연이 나오는데 용연정은 용연 바로 옆의 언덕에 서 있다. 전면 중앙칸에 용연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 벽면에 한말의 우국지사인 연재 송병선(1836~1905)이 지은 기문과 심석 최병심이 지은 제액이 걸려 있다. 용연정 위쪽으로는 1996년에 조성된 저수지인 양악댐이 있고, 용연정 바로 옆으로는 고려 후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석탑인 장수 양악탑(전라북도유형문화재)이 있다. 폭포와 소, 기암 등이 정자와 석탑과 어우러져 뛰어난 경관을 이룬다. 주위에 둘러볼 곳으로 무병장수마을, 정인승생가 등이 있다.
19.3Km 2024-10-11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56-12
장수군 계북면에 있는 석탑이다. 양악리에서 물을 따라 계곡으로 오르면 토옥동 입구에 계단식으로 된 논이 있는데, 원래 석탑은 논 가운데 있었다. 높이가 2m로 소규모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현재 토옥동 입구의 용연정 옆으로 옮겨졌다. 규모가 크지 않은 점으로 보아 불교가 들어오던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몇 차례 옮겨 재건하는 과정에서 탑재가 손실되고 파손도 심하지만 원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탑의 구조는 방형의 지대석 위에 그보다 폭이 좁은 방형대석을 올려놓고 다시 그 위에 방형의 탑신과 옥개석을 놓아 3층으로 처리하였다. 현재 탑의 상륜부는 대부분 유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19.6Km 2024-11-06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원천1길 80
거창 원천정은 원천 전팔고 선생이 후진 양성에 전념하기 위해 1587년에 지은 정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비밀모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처음 지은 정자는 양쪽에 방을 1칸씩 만들고, 가운데 마루를 2칸으로 만든 4칸짜리 목조 기와집이었는데, 1684년에 낡은 것을 후손들이 고치면서 구조를 변경하였다. 전팔고 선생은 남명 조식 선생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거창의 의병을 도왔으며, 중국 명군이 가조에 머무를 때 적극적으로 협력한 공으로 명 황제가 첨지 벼슬을 내렸고, 선조는 대사헌 관직을 내렸지만 사양하였다. 원천정은 가조분지의 중앙을 흐르는 가천천의 좌측 평야 지대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평면은 좌측에서 마루 2칸, 온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온돌방 앞에는 쪽마루를 두고 계자각 난간을 설치하였다. 공포는 장여수장집이며, 상부 가구는 도리가 세 개인 3량가이다. 최근 원천정의 후면에 사당을 건립하여 용천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정자의 정면에는 3칸 규모의 솟을삼문이 있으며, 삼문의 우측에는 원천 전 선생 신도비가 있다. 주변에는 거창 둔마리 고분, 삼일공원, 거창 항노화힐링랜드, 보해산 등 관광지가 많이 있다.
19.6Km 2024-01-18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계북면 토옥동로 114
양악마을은 국립공원인 남덕유산과 토옥동계곡을 끼고 있어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지방문화재인 양악탑과 백제시대의 절 심방사 절터가 있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봄이면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들고, 남덕유산 깊은 골짜기에서 채취한 고로쇠가 있으며, 여름이면 토옥동계곡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로 더위를 잊고 , 가을이면 돌담사이에 노란 호박과 생명력이 넘치는 곡식이 풍부하고 , 겨울이면 양악저수지에서 빙어를 낚을 수 있다. 그리고 한글학자 정인승 박사 생가와 한글기념관이 설립되어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한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경험할 수 있다.
19.6Km 2024-11-13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19
정인승선생은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건재(健齋)이다. 1897년 계북면 양악에서 출생하여, 1925부터 1935년까지 고창 고보에서 조선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우리 고유문화를 보호하는 방법으로 한글 연구를 택하고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선생은 이후 연희전문학교에서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인 한글 연구에 힘을 쏟았다. 졸업 후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며 [한글지]의 발행을 주관하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 우리말 체계화를 위한 핵심적인 연구들에 참여하였으며, 1942년 10월부터 해방 때까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 해방 후에는 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우리말 [ 큰사전 ] 편찬 작업을 완수하고 평생을 한글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으며, 1997년 유허비가 건립되었다.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에 건재 정희승기념관이 있으며, 기념관은 전시관과 선생의 동상, 정자, 유허비, 건재사라는 이름의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에 인접한 토옥동 계곡과 노목, 산죽의 밀림을 간직한 덕유산의 등산길에는 1년 4계절 수많은 등산객이 내원하는 곳으로 아이들과 청소년의 교육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