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Km 2025-06-27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노루목로 10
일산 호수공원 관리과에서 운영하지만 무인 시스템이라 보호자들이 반려견과 함께 자율적으로 매너 있게 사용해야 되는 공간이다. 40cm를 기준으로 대형견과 중소형견으로 나뉘어 놀이터도 분리되어 있지만 도사견, 핏볼 테리어, 로드 와일리 등 일부 맹견은 입장할 수 없다. 훈련용 시설과 안전 격리구역을 갖춰져 있다.
9.4Km 2025-06-23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북한산로 848-5
경기도 양주시 북한산로에 있는 북한산 전망 카페이다. 1층에서 2대의 키오스크를 통해 메뉴를 선택하고 결제하는 무인 주문 시스템이다. 1층에선 매장의 유리창을 통해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고, 야외 테라스가 연결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흔들리듯이 있어, 사진 왜곡 현상처럼 보인다. 2층 긴 복도를 지나면 테이블이 나온다. 루프탑에 오르면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송추 IC에서 차량으로 약 5분 거리에 있다. 북한산, 상장봉, 오봉, 여성봉, 도봉산 등이 보이는 산 뷰 카페이다.
9.4Km 2025-07-21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서울시 강북구, 종로구, 은평구 경계의 북한산 정상 능선을 따라 위치하는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으로 백제 개루왕 5년(132)에 북한산성의 명칭으로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 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졌고, 대서문과 장대지, 우물터, 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9.5Km 2024-10-14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로10길 20-8
천간사는 1960년에 창건되었다가 2009년 재개발로 인해 재건축되었다. 사찰에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이 있으며, 창건주스님 부도탑과 육영수 여사의 추모공덕비 등 다수의 비석과 탑들이 있다. 새로 신축하면서 국토해양부로부터 2011년 올해의 대한민국 한옥상을 수상하였다. 북한산과 둘레길이 바로 옆에 있어 공기가 좋으며,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9.5Km 2024-09-02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서문길 268
북한산성 가사당 암문 아래에 자리한 국녕사는 1713년 승병의 군영이라는 목적으로 창건된 사찰로 1711년에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한 13개 사찰들 중 하나이며 86칸 규모로 승려 청휘와 철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승군들은 북한산성 수비와 관리를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승군이 머무를 수 있는 도량은 필수적이었다. 창건 이후 국녕사는 갑오경장으로 의승군이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이후 노역에 지친 많은 스님들이 떠나게 되어 한국전쟁 이후까지 폐허로 남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국녕사가 편안하면 나라가 편안하다’라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보경 스님에 의해 법등을 다시 밝히게 된 국녕사는 1991년 화재로 소실이 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지금의 국녕사는 1998년 폐허를 딛고 가람을 중창한 것이어서 예전의 모습은 찾을 길 없다.
9.5Km 2025-07-10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 장군 윤관의 묘소이다. 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동현, 시호는 문숙으로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 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창설, 대원수가 되어 예종 2년(1107)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 하였다. 윤관은 문무를 겸한 공신으로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에 공인되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되었다. 묘역의 규모는 크고 웅장하며 왕릉의 사초지와 같이 조성된 경사진 언덕의 정상에 봉분이 자리한다. 묘역은 2단의 계체석이 설치되어 3단으로 구분되며, 이 중 가장 상단에 봉분이 있다. 원형 봉분의 하단에는 다듬은 장대석으로 호석을 둘렀고 주위에는 八 자 모양의 곡장이 둘리어 있다. 봉분 정면 왼쪽에는 영조 42년(1766)에 세워진 묘비가 있으며, 2단 묘역에는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 2기가 있다. 3단에는 가운데에 4각 장명등이, 양옆으로 문인석,무인석각 3기와 동자석과 석양주, 석마주가 각 2기가 설치되어 있다. 윤관 묘역의 석물은 묘비와 복두에 수직 홀을 들고 있는 고려시대 양식의 석인상을 제외하고 대부분 후대에 조성된 것이다. 묘역 아래에는 영정을 모신 여충사와 철종 12년(1861) 건립한 교자총비, 1966년 세운 신도비 등이 있다. 주변에 같이 볼 수 있는 관광지로는 파평윤씨의 성지로 알려진 파평용연과 용상사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을 비롯해 벽초지 수목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