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도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대부도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대부도

13.9 Km    190297     2023-11-17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황금로 1531

안산의 하와이로 불리는 대부도는 시화방조제로 연결이 되어 육지가 된 섬이지만 아직도 섬이 가진 낭만과 서정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대부도 가는 길목은 섬과 섬을 잇는 색다른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특히 돌이 검다는 탄도, 부처가 나왔다는 불도,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감도를 비롯해 섬 여섯 개가 마치 형제처럼 어깨를 맞대고 서해에 있다 해서 불리는 육도, 겨울이 되면 굴과 바지락을 채취하기 위해 인근 도리도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설이 되기 전에 돌아오는 독특한 생활방식을 가진 풍도는 독특한 멋을 간직한 곳이다. 대부도는 너른 갯벌에서 갯벌 체험을 즐길 수 있고 해 질 녘 풍경이 아름다우며 해안을 따라 늘어선 바지락칼국수, 조개구이집들도 유명해 수도권 시민들의 하루 나들이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대부도에서 선재대교를 건너면 선재도로 들어가고 다시 선재도에서 영흥대교를 건너면 영흥도로 들어가게 되니 선재도와 영흥도는, 섬 아닌 섬이다. 대부도에서 연결되는 또 다른 섬 아닌 섬들로 색다른 드라이브를 즐기려는 차들이 많이 찾고 있다.

뜰안에

뜰안에

13.9 Km    1     2024-04-08

경기도 화성시 성주골길 37

뜰안에는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쌈밥 전문점이다. 싱싱한 쌈야채와 입맛에 맞는 고기 요리를 선택하여 쌈밥을 즐길 수 있다. 쌈밥 메뉴로는 소불고기, 고추장제육, 간장제육이 있다. 뜰안에보쌈정식도 있는데, 이 정식은 예약 주문 시에만 맛볼 수 있으니 미리 예약을 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뜰안에밥상은 한정식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다양한 나물 반찬들과 밑반찬, 고등어구이까지 곁들인 솥밥을 쌈채소와 즐길 수 있어 인기가 좋다.

남양성모성지

남양성모성지

13.9 Km    30245     2024-05-24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112

남양 성모 순례지는 병인년(1866년) 대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무명 순교지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치명일기(致命日記)와 증언록에 기록이 전해지는 남양의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사람뿐이다. 남양 순교지는 다른 순교지와는 달리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성역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작은 정성들을 모아 가꾸어져 오던 남양 순교지는 1991년 10월 7일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화성시에서 화성 8경 중의 하나로 지정하여 홍보하고 있을 만큼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남양순교성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강암의 대형묵주알, 그리스도왕상, 성모동굴, 오솔길 소자상, 요셉성인상 등이 있으며, 아늑하고 성스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성지 조성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 성모님 품 같이 아늑하고 포근한 경관을 지닌 곳으로 시민은 물론 전국의 천주교 신도들의 순례지 겸 휴식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 순교지로서의 남양 조선조 때 남양은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삼품의 도호부사가 부임했던 곳이다. 남양부사는 경기도 관찰사의 감독 아래 이반행정에 관한 권한 외에도 민사소송과 형사범을 다루는 사법권까지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양은 물론 그 인근에서 붙잡은 천주교인들을 도호부사가 있던 남양으로 끌어다가 처형했다. 그리고 남양은 지리적으로도 신앙 활동이 자유로웠던 중국과의 연락이 용이한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조 당시 이곳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찾아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남양과 이웃해서 백학 교우촌이 있던 것도 이곳이 순교지가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 - 김 필립보(1818~1868) 충청도 내포사람으로 조모의 가르침에 따라 입교하려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은 후 후일 반대하던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했다. 전교도 열심히 했고 사제의 공소 방문 때는 사제의 성무를 도왔으며 교우들이 바른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병인년 대박해 때 피신하여 살다가 1868년 남양 감영 포졸에게 아내 박 마리아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이 부부는 온갖 형벌에도 배교치 않았으며 한달 동안의 옥고 끝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나이 50세였다. - 박 마리아(1818~1868) 순교자 김 필립보의 아내로 1868년 남편과 같이 남양 감영 포졸에게 잡혀서 남편과 함께 남양으로 끌려와 한달 동안의 옥고와 가혹한 형벌을 이겨내고 남편 김필립보와 같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나이 50세였다. - 정 필립보(?~1867) 경기도 용인의 것옥골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옥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 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 김홍서 토마(1830~1868) 수원 갈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감옥에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의 나이는 38세였다.

조암시장

14.0 Km    0     2023-10-04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서로22번길 22

경기도 화성시의 조암 시장은 삼괴(三槐) 장터라고도 불렸다. 조암은 바다와 가깝고 농업이 발달하여, 굴, 꽃게 등과 같은 수산물 거래가 활성화되고 농작물의 거래도 크게 이루어졌던 곳이다. 80년대가 되면서 우시장이 사라지고, 화옹방조제가 생기면서 수산물 거래가 줄어들며 점차 시장의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장날이 되면 조암 시장의 푸근한 인심과 정을 느끼기 위해 방문하는 이들로 북적인다. 인근에 공영주차장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주차하기에 편리하다.

화성 국화리어촌체험마을

14.1 Km    21312     2023-02-16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국화길 8

국화도는 조선 시대에 유배지였을 정도로 조용하고 자그마한 섬으로 현재 22가구에 6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배에서 내려 선착장을 지나 민박집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왠지 낯익은 단층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교실이 두 칸뿐인 국화 분교로 지금은 폐교된 상태이다. 장고항이나 왜목마을에서 바라보면 국화도와 형제처럼 나란히 토끼섬이 떠 있는데, 500m쯤 되는 국화도와 토끼섬 사이에는 썰물 때에 갯바위와 모래밭이 드러나 걸어서 건너갈 수 있고, 이 바닷길 주변에는 고동을 비롯한 각종 조개가 많아 누구든지 호미와 망태기를 하나 들고 나서면 1시간 만에 가득 채울 정도이다. 국화도 선착장 마을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면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바위투성이인 동쪽 해안과는 달리, 조개껍질과 모래가 적당히 어우러진 천혜의 해수욕장이 활처럼 동그랗게 펼쳐져 길게 이어진다. 해수욕장은 경사가 심하지 않아서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으며, 모래와 자잘한 자갈이 섞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서해답지 않게 물이 매우 맑아 스쿠버 다이버들이 즐겨 찾는 지역으로, 해수욕장 서쪽에 있는 매박섬도 토끼섬과 마찬가지로 썰물 때에는 바닷길을 통해 걸어갈 수 있다. 국화도 해수욕장의 동쪽 끝은 바위지대이고, 부근의 산자락엔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북향한 해수욕장 앞에 서면 바다 건너편 입화도와 도리도가 빤히 건너다보인다. 이처럼 해수욕은 기본이고, 어선도 타보고 개펄체험도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국화도이다.

국화도

국화도

14.1 Km    216781     2024-05-16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국화길 8

국화도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소재지에서 남서부 28㎞ 지점에 위치함. 섬 동쪽은 당진군 석문면, 북쪽은 입파도와 인접된 유인도로 바지락・굴 등 어패류 채취를 주업으로 하는 도서지역 어촌마을이다. 꽃이 늦게 피고 늦게 진다고 해서 늦을‘만(晩)’자를 써 만화도라 불렸으나 일제 강점기때 국화가 많이 피는 섬이라 해서 국화도라 바꿔 부르게 되었는데, 실제로 섬 전체에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국화도는 배를 타고 장고항에서 10분, 궁평항에서 1시간 거리에 위치하며, 걸어서 2시간이면 섬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섬이다. 장고항에서 여객선으로 10분정도 거리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섬으로 장고항에서 바라보는 국화도는 섬을 온통 뒤덮고 있는 소나무숲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는 섬처럼 보인다.
나들이 명소로 손색이 없는 풍광을 자랑하는 국화도는 당일치기 코스로도 좋지만 하루 이틀 섬에 머무르며 고즈넉하고 소박한 어촌마을의 정취를 느끼고 휴식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물이 맑은 해수욕장에서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기고, 아이와 함께 호미를 들고 나가 고둥과 조개 등 다양한 해산물을 잡거나 어선을 타고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시리도록 예쁜 들국화 외딴섬 국화도이다.

남양시장

남양시장

14.2 Km    0     2023-10-04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1165-36

남양시장은 5일장으로 1일과 6일에 장이 선다. 다른 시장에 비해 큰 규모는 아니지만 인근 농가에서 생산한 무공해 농산물과 생필품, 각종 먹거리들을 만날 수 있다.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전통시장이다. 남양 재래시장 공영주차장을 이용하면 좀 더 편리한 이용이 가능하다.

씨엘관광농원캠핑장

씨엘관광농원캠핑장

14.2 Km    1     2023-04-27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황금로 974-13

대부도의 중앙에 위치한 황금산을 병풍삼아 자리잡고 있는 씨엘관광농원 캠핑장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황금로 976에 있다. 고객의 이용편의를 위해 개수대, 샤워장, 화장실, 편의점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물놀이장, 풋살장, 동물농장, 산책로를 설치하여 방문객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농방부지에 심은 밭작물 수확체험, 특수작물 시설재배 체험을 할 수 있으며, 미래형 첨단 식물 공장도 체험 가능하다.

메추리섬

메추리섬

14.2 Km    1     2023-11-10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남동

메추리섬은 대부도 남쪽의 끝 뿌리라고 하여 흘곶동이라고 불리는 마을 앞에 있는 섬으로서 섬 형태가 부리가 뾰족한 메추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메추리섬 주변은 수산물 채취가 불법이며, 쓰레기 문제로 인해 노지 캠핑이나 차박, 낚시도 할 수 없고 갯벌 체험만 가능하다. 갯벌 체험은 흘곶 어촌마을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주말에는 트랙터로 먼 갯벌까지 데려다주며 화장실과 샤워장, 세족장을 이용할 수 있다. 안산 대부 해솔길은 오솔길과 해안가를 따라 대부도 한 바퀴 돌 수 있는 자연 친화적으로 조성된 총 10개의 코스인데, 이 중에서 해솔길 4코스는 쪽박섬-메추리섬-고래부리 선착장-대남초교-느릿부리안길-유리섬박물관 코스로 총 11.5km이며 3~4시간 정도 소요되는 아름다운 해안가를 맛볼 수 있는 구간이다. 메추리섬과 함께 갯벌과 바다 쪽으로 함께 보이는 다른 바위섬들을 바라보며 조용한 걷기 여행을 즐기고 시간이 되면 멋진 일몰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홍난파 생가

홍난파 생가

14.2 Km    18770     2023-02-22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홍난파길 32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여명기를 개척한 난파 홍영후(1898~1941년)의 생가이다. 홍난파는 1898년 4월 10일 홍순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12년 YMCA 중등부를 졸업하고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양악부를 마친 뒤 동 전습소의 교사가 되었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뒤 귀국하였으며, 1920년「봉선화」를 작곡하였다. 1922년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였고 1925년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한편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발간하였을 뿐 아니라 소설도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도 보였다.

1926년 다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교에 편입하고 이듬해 도쿄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929년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음악학교에서 연구하고 1933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이화여전 강사를 지낸 뒤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전임하였다. 1935년부터「백마강의 추억」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나소운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1년 8월 지병인 늑막염이 악화되어 43년간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봉선화」,「성불사의 밤」,「옛동산에 올라」등 가곡과,「달마중」,「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곡이 있다.

현재의 생가 건물은 당초 멸실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한 것으로 목조 초가 4칸의 ‘ㄱ’자형 구조이다. 방 2개와 부엌으로 단촐하게 구성된 집에는 아담한 마당이 딸려있고 건물 처마 밑으로 난파의 초상화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을 찍어놓은 사진 몇 장이 걸려 있다. 아늑한 마을에 자리한 초가를 둘러보노라면 ‘고향의 봄’ 가락이 곳곳에서 들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