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학교 세종아트갤러리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세종대학교 세종아트갤러리 - 주변 여행 및 근처 관광 명소 정보를 소개합니다.

세종대학교 세종아트갤러리

세종대학교 세종아트갤러리

8.5Km    2025-01-15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09 세종대학교

세종아트갤러리는 세종대학교 광개토관 내 위치한 140평의 공간으로서 2006년 개관하여 젊고 유능한 예비작가들을 위한 전시를 제공해왔으며, 최근 진취적이고 역량있는 중견 작가들의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엔터식스 왕십리역점

엔터식스 왕십리역점

8.5Km    2025-07-24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광장로 17 (행당동)

엔터식스는 유럽의 거리 풍경을 주제로 한 국내 유일의 테마파크형 쇼핑몰이다. 여섯 개의 특별한 색깔이 있는 에비뉴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파란 하늘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감상하며 쇼핑할 수 있는 색다른 테마의 쇼핑공간이다. 단순한 소비 공간에 숨을 불어넣어 고객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설렘을 제공하여 끊임없이 고객의 마음과 커뮤니케이션하고자 한다.

이니스프리 왕십리역

8.5Km    2024-03-24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광장로 17 (행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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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영 왕십리엔터식스

8.5Km    2024-04-24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광장로 17 (행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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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식스 왕십리역사점

㈜엔터식스 왕십리역사점

8.5Km    2024-03-24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광장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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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즈 왕십리역

8.5Km    2024-03-24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광장로 17(행당동, 지상2층 맞이방 2-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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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트 왕십리

8.5Km    2024-04-24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광장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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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비 유강원 석물

8.5Km    2025-07-30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

조선 제27대 왕이자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황후, 순명효황후의 능이었던 옛 유강원 터에는 당시 능 주위에 세웠던 석조물들이 남아 있다. 순명효황후는 민태호의 딸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에 사망해 유강원에 묘소가 조성되었다. 이후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현재의 유릉으로 옮겨 함께 모셔졌고, 뒤이어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도 같은 능에 합장되었다. 유강원 터에는 석등, 문인석, 말, 양, 호랑이 등 20여 기의 석조물이 남아 있으며, 섬세한 조각 솜씨가 돋보인다. 이 석조물들은 조선 말기 왕실 석조각의 수준과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이다.

갗

8.5Km    2025-04-23

서울특별시 종로구 난계로27길 30-8 (숭인동)

신설동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가죽과 원단 산업의 중심지이다. 수많은 장인과 상인들이 이 거리를 가득 메우던 전성기를 지닌 곳이었으나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갗은 잊혀 가는 신설동 가죽·원단 거리의 역사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신설동 인근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갗은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신설동의 가죽과 원단 문화에 다시 한번 관심을 기울이며, 매장 외부와 내부 공간, 심지어 디저트와 음료까지도 가죽과 원단을 형상화한 콘셉트로 구성하였다. 매장 이름 또한 '가죽'의 순우리말인 '갗'에서 비롯되었으며, 단순한 카페 혹은 바를 넘어 과거 가죽 거리가 품고 있던 역사·문화적 가치와 이야기, 그리고 추억을 현재로 이어주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 갗은 지역 상인들과의 노력을 통해 다시 한번 신설동과 옛 가죽 거리의 새로운 부흥을 꿈꾸며, 순한 소비 공간을 넘어 지역의 산업사와 문화를 되짚는 플랫폼으로서 신설동의 정체성과 스토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강이승훈선생동상

8.5Km    2025-07-30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16

남강 이승훈선생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가난한 서민 가정에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16세에 유기상의 점원이 되었다. 약 10여 년간 유기행상과 공장 운영으로 큰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나라의 위기를 절감하고 평양에서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받아 40대에 사회운동에 뛰어들었으며,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고 신민회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해 징역 3년형을 받았다. 1922년 출옥 후 자면회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헌신했으며,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